TACMINA 창업의 땅
이쿠노의 역사
광산과 함께 발전
이쿠노광산의 역사는 깊은데, 그 시작은 헤이안 시대 초기인 807년이라고도 전해집니다.
본격적으로 채굴이 시작된 것은 무로마치 시대로, 1542년에 다지마 수호직 야마나 스케토요가 은광맥을 발견하여 광산 조업에 나섰습니다.
이후 일본을 대표하는 광산으로서 크게 발전하여 '사도는 금, 이쿠노는 은'이라고 병칭되게 됩니다.
오다 노부나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이쿠노를 직할지로서 지배했습니다. 에도 시대에는 도쿠가와 막부가 직할지로서 봉행이나 대관을 두어, 광산 개발을 진행시켰습니다. 전성기에는 월간 약 500kg의 은을 산출했으며 지역 인구는 2만 명을 넘었습니다.
- 은광 두루마리 그림(에도 시대)
- 대관소
근대 광업도시로서의 번영
메이지 유신 후, 이쿠노는 일본 최초의 관영 광산으로서 부흥했습니다. 장 프랑수아 코아네를 비롯한 광산 기사들이 프랑스에서 초대되어, 일본 근대 광산의 모델로서 대규모 개발이 이루어졌습니다.
광석 등을 운반하기 위해 1878년에 이쿠노와 세토나이카이 측의 시카마 항을 잇는 일본 최초의 고속 산업 도로 '긴노바샤미치'가 개통되었습니다. 또한 1894년에는 철도도 정비되었습니다.
주변에서는 공장이나 직원주택 등이 일체적으로 개발되어 유례없는 근대적인 광업 도시를 형성했습니다.
광산 본부
채굴 현장
광차길
광산 사택
광산 문고
긴노바샤미치
제2차 세계 대전 후~현재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도 이쿠노는 인근의 미코바타 광산, 아케노베 광신과 함께 일본 유수의 광산으로서 조업을 이어가며, 부흥과 고도경제성장에 공헌했습니다. 1973년에 채굴이 종료되고 폐산된 후에는, 사적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현재도 이쿠노에는 고야도, 가케야와 같은 마치야(상가)나 외국인의 저택을 본떠 만든 양옥, 은이나 동의 정련 과정에서 나오는 광재를 굳힌 돌인 가라미이시로 만든 담 등 지난 날의 번영을 엿볼 수 있는 풍경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석주문(국화 가문(家紋))
갱도 입구
긴잔코 호수
구 구사카 료칸(1910년 건축)
구 이쿠노 경찰서(1886년 건축)
가라미이시 돌담
- * 이 페이지의 사진은 아사고 시청 이쿠노 출장소에서 제공해 주셨습니다.